<공연리뷰> "세심한 연출, 격정적 가창" (2009)
지난 몇 년 사이에 지역마다 수준 높은 공연장이 들어섰지만, 자체 제작 공연 편수는 많지 않다. 특히 제작비가 많이 드는 오페라는 거의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다행히 최근에는 지역 공연장 몇 곳이 힘을 합해 오페라 한 편을 공동제작하는 아이디어가 실행 중이다. 공연에 관심 있는 지역주민에게나 오페라 애호가에게나 무척 반가운 일이다.
21일 노원문화예술회관에서 막을 올린 마스네의 오페라 '베르테르(Werther)'는 의정부예술의전당, 하남문화예술회관, 노원문화예술회관이 공동으로 제작해 세 극장에서 차례로 공연하는 작품. 국내 최고수준의 지휘자, 연출가, 출연진이 힘을 합했다.
김덕기가 지휘하는 프라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비장하고 처연한 전주곡을 연주하는 동안 관객은 이미 자살한 베르테르의 시신이 관에 실려 무대를 떠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배경에는 곧게 뻗은 자작나무 숲이 보이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 속에 홀로 남은 샤를로트(괴테 원작의 '로테')가 오열한다. 강렬한 인상으로 시작되는 무대다(무대디자인 오윤균).
전주곡이 끝나고 1막이 시작되면, 배경은 그대로지만 계절이 달라진다. 베르테르가 죽는 시점은 크리스마스 이브지만, 극이 시작되는 시점은 7월이기 때문이다. 무대 세트를 바꾸지 않고도 조명의 변화만으로 밝고 신선한 계절적 전환이 가능했다(조명디자인 김명남).
남의 아내가 된 여주인공에게 집착하는 남자주인공 베르테르의 비극적 사랑이 초점인 이 오페라는 시종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로 진행된다. 그러나 샤를로트의 아버지 역을 맡은 베이스 김진추, 그 친구 역의 테너 김동섭과 베이스 이준석은 자연스럽고 유머러스한 연기로 극의 초반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어린 동생들을 연기한 노원구립소년소녀합창단 12명의 밝고 명랑한 분위기도 관객을 즐겁게 했다.
최고의 감동은 역시 타이틀 롤을 맡은 테너 박현재에게서 나왔다. 첫 등장 때부터 마지막 죽음 장면까지 슬픔과 고뇌의 표정으로 일관한 그는 베르테르 역에 더할 나위 없는 적역이었다. 그의 미성과 뛰어난 가창력은 이미 공인된 바이지만 이날 박현재는 이전 어떤 무대에서도 볼 수 없던 폭발적이고 격정적인 표현력으로 관객들을 눈물짓게 했다.
3막 샤를로트와의 재회 장면에서 긴장이 점차 고조되다가 마침내 그가 오시안의 시 '왜 나를 깨우는가, 봄바람이여'를 노래했을 때 객석은 클라이맥스의 감동으로 가득 찼다. 늘 완벽하게 노래하고도 연기 면에서 아쉬움을 남겼던 그에게서 이런 엄청난 에너지를 끌어낸 것은 세심하고 치밀한 연출의 힘으로 보인다(연출 장수동).
샤를로트 역의 메조소프라노 서윤진 역시 프랑스적 관능미와 독일적 소박함을 적절하게 조합한 적역이었다. 깊고 울림이 풍부한 음색과 탁월한 연기력으로 서윤진은 샤를로트의 억제된 애정 및 마음의 혼란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베르테르와의 연기 호흡도 나무랄 데 없었다. 샤를로트의 남편 알베르를 노래한 바리톤 오승용은 건실하고 상식적인 극중 인물 이미지로 일관하다가, 3막의 샤를로트를 추궁하는 장면에서 결정적인 연기력을 발휘했다.
소프라노 신델라는 외모나 음색 면에서 15세 소피 역에 꼭 알맞은 가수였다. 그는 가볍고 자연스러운 미성만큼이나 산뜻한 연기로, 슬픔에 지친 주인공들 사이를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4막 베르테르의 죽음 장면을 그의 집이 아닌 자연 속(1막 배경)으로 옮겨 놓은 것은 대단히 효과적인 설정이었다.
노원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은 6백석 규모의 중극장이어서 오케스트라 피트도 상대적으로 좁은 편이다. 그러나 오케스트라는 마스네 음악의 비장미와 드라마틱한 아름다움을 효과적으로 살려내며 청중으로 하여금 악기 하나하나의 명료한 음색에 귀 기울이게 해 주었다. 22일은 한국어 공연이다.
(서울=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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