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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열정적인 용광로로 관객들을 몰아갈 수 있을까. 사실 오페라를 재미없다고 하는 관객들이 흔히 하는 말은 가수들의 노래와 연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아 감정몰입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슨 내용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이탈리아어 혹은 독일어로 진행되는 내용 전개는 차치하더라도 뻣뻣한 자세로 무감정의 노래를 부르는 오페라 가수를 한번이라고 보고 온 관객이라면 다시는 오페라 극장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13일 막이 오른 국립오페라단의 '가면무도회'는 이런 점에서 관객들의 몰입도를 최고치로 끌어올려줬다. 지난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테너 정의근은 “관객들과 한바탕 꿈꾸는 듯한 무대를 펼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는 품위있으면서도 순정적인 사랑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 화해와 용서를 구현하는 국왕 역을 섬세하게 소화해냈다. 매 장면마다 심경변화를 관객들이 수시로 알아차릴 수 있게 목소리 톤을 밀도있게 조절해나가 관객을 제 편으로 끌어들였다. 3막의 유명 아리아 ‘나 영원히 그대를 잃을지라도’에선 주인공의 절실한 마음이 응축되며 터졌다. 이는 2막에서 아멜리아와 함께 부른 2중창 ‘나를 피하는 그대라 하여도, 나 그대를 영원히 사랑하리’에서 차근 차근 감정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 남녀가 진짜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극적 감흥이 객석에도 충분히 전달된 결과이다.
150분간 한바탕 꿈을 꾸고 나온 테너 정의근은 공연의 막이 내리자, 만감이 교차하는 울먹이는 얼굴로 커튼콜 무대에 섰다. 이 얼굴 표정만으로도 이번 무대를 위해 그가 얼마나 고뇌했고, 가슴 졸이고 있었음이 전혀져 ‘아이를 처음 학교에 보내고 난 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자식을 보는 어미의 심정’으로 박수를 쳤다. 아니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베르디의 ‘가면무도회’가 테너의 아리아로 알려져 있지만 조금만 눈썰미가 있는 관객이라면 바리톤 아리아로 불러도 손색이 없음을 알게 된다. 1막 국왕에 대한 충성을 명세하는 ‘당신의 기쁨을 위해서라면’에서 바리톤 고성현은 믿음직한 심복의 이미지를 중후한 음색으로 아로새겼다. 첫 단추가 잘 꿰어져야 다음 막에 ‘아 그랬구나! 주인공의 심경변화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라는 말을 내뱉을 수 있다. 3막 레나토가 국왕과 아내의 밀회를 알게 된 후 배신감에 치를 떨며 ‘너였구나, 내 영혼을 더럽힌 자’를 부를 때 관객 모두가 분노했다. 감정의 끈을 능수능란하게 소화한 고성현은 레나토의 잃어버린 사랑의 희망에 대한 안타까움도 곧 드러냈다.
다이나믹한 파워가 돋보이는 인물은 아멜리아 역을 맡은 소프라노 임세경이었다. 2막을 온전히 자신의 무대로 만들어낸 임세경은 드라마티코 소프라노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허락되지 않은 사랑에 빠진 여자의 두려움을 천천히 뽑아내더니, 곧 사랑 앞에 한없이 약해지는 여자의 마음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이어 ‘죽음의 소리’가 들리자 낮게 깔리는 저음으로 다가오는 운명을 구슬프게 노래했다. 이 여세를 몰아 3막에서 애달픈 모성을 그 누구도 끊어낼 수 없는 강인함으로 확인시켜줬다. 남편의 다리를 붙잡고 수차례 오열하는 감정표현이 노래에 그대로 반영돼 비장함이 더했다.
너무도 사랑스런 캐릭터인 오스카 역 정시영은 레제로 소프라노의 매력을 발휘하며 관객들의 귀를 호강시켜줬다. 1막의 ‘빛나는 별을 보세요’에서부터 3막의 ‘왕의 복장을 알고 싶지요?’까지 상쾌하고 경쾌한 보이스 톤으로 ‘바지역할’의 매력을 한껏 드러냈다. 메조소프라노 이자 알토로서 울리카 역을 맡은 이아경은 1막의 짧은 등장만으로도 확연히 존재감을 빛내는 우아한 보이스를 뽐냈다. 수병 실바노 역 베이스 박준혁은 열정적으로 울리카의 신통력을 찬양했으며, 사무엘 역 베이스 성승민과 톰 역 베이스 김대엽은 레나토를 놀리는 2막 피날레 장면에서 ‘하 하 하~’ 하는 비극과 희극이 결합된 매력적인 저음을 뽐냈다. 법관 및 하인역을 맡은 테너 김건우는 특히 법관 장면에서 익살맞은 표정과 제스처로 오스카와 호흡을 맞췄다.
‘가면무도회’는 1792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1746~1792) 암살사건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중심에서 검열의 위협을 뚫고 이탈리아 민중들이 지켜낸 화제의 오페라이기도 하다. 김의준 예술감독의 취임 후 첫 작품으로 2011년 새롭게 재현된 국립오페라단의 ‘가면무도회’는 거울과 가면으로 위장한 화려한 무도회의 음악 이면에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사랑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디자이너 이태섭의 손을 거친 무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차가운 화려함’이다. 죽음에 대한 메타포를 구겨진 종이 모양의 스크린에 형상화해 불안함을 고조시켜 나갔다. 빨간 피가 조용히 번지는 스크린으로 시작하더니 마지막은 모든 것을 보고 있었던 죽음의 눈(eye)으로 막을 내렸다. 넓은 연회장에 위태로이 매달린 깨진 유리조각 샹들리에는 누군가의 가슴 혹은 머리에 곧 상처라도 낼 듯 위태로웠다. 리카르도의 등장 역시 심상치 않았는데, 비행기의 중심부가 아닌 날개를 연상시키는 아슬아슬한 상단에서 미끄러지듯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리카르도의 운명은 1막과 3막을 달리한 왕의 의자에서도 예견할 수 있었다. 즉, 1막은 기타줄처럼 사이 사이가 빈 의자 등받이를 연출해 공허하고 고립된 왕의 이미지를 강조하는가 하면, 3막은 금이 간 유리의자 위에 앉은 왕을 연출해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의 목숨이 산산조각 날 것이라는 불운한 운명을 강조했다.
국립오페라단과 수차례 작업해온 댄스 씨어터 까두(안무 박호빈)의 무용도 작품에 힘을 실어줬다. 1막의 테너 칸초네 ‘이번 항해도 무사할지?’ 부분에서는 리듬의 흐름을 탈 수 있는 익살스런 몸동작을 보여주는가 하면, 리카르도의 운명을 알려주는 죽음의 사신(해골 분장과 의상을 함)을 울리카의 주술 장면에서 불러냈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죽음의 사신 안무는 계속 빛을 발했다. 리카르도와 레나토의 운명적인 악수장면, 2막 죽음이 죄악과 함께하는 공포의 들판 첫 무대를 장식한 장면, 화려한 무도회가 시작 되기 전 죽음을 예감할 수 있게 유리 문 뒤편으로 어슬렁 거리게 한 장면, 마지막 리카르도의 죽음과 동시에 죽음의 사신이 쓰러지는 장면 등으로 인해 총체적인 감흥이 몰려왔다.
연출가 장수동은 원작을 ‘미니멀한 세트’ 위에 어느 ‘가상의 혁명 시대’로 풀어냈다. 그 중 3막 레나토의 집(화장실)이 상당히 사실적으로 연출됐다. 국왕 암살음모와 함께한 두루마리 화장지, 음모의 종이를 삼키는 수세식 변기, 모성을 감지할 수 있게 하는 목마 장난감 등이 인상적이다. 단, 무도회 초청장을 가져온 시종 오스카카 '바지역할' 임에도 성적인 색채를 부각시킨 채, 사무엘과 톰이 워터보드(waterboard:물 고문의 일종)하듯 연출한 장면은 쉽게 납득가지 않는다. '죽음의 분위기'에 대한 암시라고 간단히 정리하기에는 무리가 따랐기 때문이다.
 리카르도(테너)-레나토(바리톤)-아멜리아(소프라노)-오스카(소프라노)팀은 각 2팀이다. 정의근-고성현-임세경-정시영팀은 목요일(13일)과 토요일(15일)에 출연하고 김중일-석상근-이정아-구은경 팀은 금요일(14일)과 일요일(16일)에 출연해 각기 다른 색채를 분출할 예정. 16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특별히 대구국제오페라축제(조직위원장 김신길)와 지역극장합작오페라로 공동 제작, 10월 28일과 29일 양일간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제9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 폐막작으로도 선보일 예정.
연주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마르코 발데리가 지휘한다. 합창은 서울시합창단(지휘 오세종)과 과천소년소녀합창단. 연기는 진아트컴퍼니(대표 김경진).
공연칼럼니스트 정다훈(otrcoolpen@hanmail.net) |